이렇게 인연의 끈이 닿아 기쁘고, 영광스럽습니다. 

‘진달래 사랑방’을 발견해 주시고, 

이 소개 글을 클릭해 읽어 주셔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저는 진달래 사랑방의 주인, 달래라고 합니다. :)

국내파로서 영어를 갈고 닦아 영어 특기자 전형으로 대학에 들어갔고, 

지금까지 30개 국을 배낭여행한 이력을 갖고 있는데요. 


제가 그동안 부지런히 쌓아온 실력과 경험, 

그리고 그 안에서 형성한 귀한 세계관을 나누고자 

이 커뮤니티를 열어보게 되었어요. 


자, 이제 여섯 가지 주제로 나누어 제 소개를 시작해 볼게요. :-)




1. 2019년 네팔에서 죽을 뻔한 경험을 한 뒤 일어난 변화, “제2의 생”

2. 브런치 작가, 그리고 매일 글을 쓰는 삶

3. 20대 농부 시절: 제도권 사회를 벗어나 자유인으로 살고자 한 실험

4. 내 생의 또 다른 전환점, 태국 교환학생

5.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호텔리어 시절, 아픔을 글로 치유한 이야기

6. 내가 궁극적으로 가고 싶은 길: 세계 시민, 나만의 색깔을 가진 사람




1. 2019년 네팔에서 죽을 뻔한 경험을 한 뒤 일어난 변화, “제2의 생”


2019년 4월, 네팔의 어느 밤이었어요. 

저는 낭떠러지를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합니다. 


오토바이 사고였어요. 

친구가 운전하던 오토바이를 뒤에 타고 가고 있었는데요. 

친구가 왼쪽으로 커브를 돌 때 중심을 잃고 넘어지고 만 거예요. 

저는 길의 모퉁이에 걸쳐 앉아 있다가 그만 절벽 쪽으로 구르게 되었어요.

( 당시 발이 퉁퉁 부었던 발. 무릎에  흉터가 진하게 남았을 뿐, 난 살아남았다!! )


사망이나 큰 부상을 겪었을 것이 분명해 보이는 위험한 언덕에서 저는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이때 절 구해준 특별한 존재가 있었는데요.


그 존재는 바로 나무였어요. 

알고 보니 나무 아래에는 하얀 포대자루가 있었거든요. 

그것과 나무의 넝쿨 사이에 걸려 제가 더 이상 굴러가지 않고 제가 멈춰 섰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조금만 다른 각도로 떨어졌더라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절벽은 가파르기도 했지만, 곳곳에 바위와 빈 병들로 가득했으니까요.

( 네팔 창구 나라얀 마을/ 나의 구원자, 나무 넝쿨. 

넝쿨과 흰 포대 자루 사이에 끼어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


게다가 저를 살려준 그 나무는 그 곳에 있던 유일무이한 나무였어요. 

또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나무의 넝쿨이 굉장히 독특하다는 것이었죠!


‘ㄴ’ 자 모양으로 넝쿨이 길게 늘어져 있는 나무였는데 살면서 그런 나무는 처음 보았어요. 

마치 그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는 듯, 나무는 넝쿨을 길게 뻗어 저를 감싸 안아주었어요.


이렇듯 저는 첫 네팔 여행 중, 죽음을 종이 한 장 차이로 스쳐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나무의 넝쿨 덕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매우 특별한 경험이었지요!


한국에서 생활하는 요즘도 매일같이 네팔을 떠올리며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생을 찬미하고, 

살아가는 의미와 살아갈 의지를 되새기고자 합니다.


2019년 4월 13일, 네팔 달력으로 새해 (4월 14일)를 앞둔 전날, 

저는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새 삶을 시작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네팔 친구들에게도 그 이야기를 했었고요.


그리고 그 말대로 새해를 앞둔 몇 시간 전, 저는 ‘새롭고도 생동감 넘치는 생’을 선물 받게 되었답니다.


( 네팔 여행을 갔을 때 들고 간 책. 이 책 안에 나를 살려준 나무의 잎을 고이 넣어 두었다. 이제 내게는 더없는 축복의 상징이 된 나뭇잎... )


2. 브런치 작가, 그리고 매일 글을 쓰는 삶


네팔에서의 사고 덕분에 저는 브런치 작가도 될 수 있었어요. 

사실 전 이미 2016년 초부터 브런치에 글을 써볼 것을 추천받았어요. 

관심이 있었는데도 지원조차 하지 못했죠.


그랬던 저였는데 네팔에서의 경험은 도저히 썩히고 싶지 않았어요. 

한국에 돌아온 뒤 브런치 작가 되기에 도전했습니다.


무척 감사하게도, 단숨에 합격했어요. 

세 편의 글에 네팔에서의 극적인 경험과 

그로부터 얻은 깨달음을 귀중히 담은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2020년 1월에 브런치 작가가 되고 2월부터 본격적으로 브런치 생활을 시작했어요. 

시간이 흐르며 다음/카카오톡 메인 노출 2회, 브런치 메인 노출 1회, 

네이버 메인 노출 1회, 그리고 웹진 <ㅍㅍㅅㅅ>에 기고 5회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 이야기가 널리 읽힌다는 것이, 제 목소리가 더욱 큰 세상을 만나 부딪히며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신기했어요.


그러면서 저는 브런치 작가가 된 지 반년도 채 되지 않아 경이로운 변화를 맞이합니다. 

2020년 7월에 <하루 15분 영어 필사 모임>이라는 모임을 만든 게 시작점이었어요.


밤마다 여운이 짙은 영어 문장을 필사하는 일은 저를 소중히 여기는 방법 중 하나였거든요. 

영어 필사를 하면서 '이렇게 좋은 걸 왜 나 혼자만 하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 혼자만 할 게 아니라 더욱 많은 분들과 이 감동을 나누어 보고 싶다!'라는 

생각에서 모임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모임이 개설된 뒤, 저처럼 영어 필사를 좋아해 주시는 분들이 많아 무척 기뻤어요!


1기부터 71명, 2기에는 104명, 그리고 3기에는 136명이 참여해 주셨고,

얼마 전이었던 2022년 7월 6일에는 2주년 생일을 맞이하기도 했답니다. :)

이 모든 일은 글쓰기가 아니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기적입니다.


유튜브에도 도전해 보고 싶어 브랜드 계정을 새롭게 생성하고, 영상도 찍어 올려 보았답니다. <영어, 글쓰기, 여행으로 내 삶을 꽃피우는 방법>이라는 주제로 모임 안에서 무료 강연을 기획한 것을 시작으로 많은 강연, 강의도 시도해 보고 있어요.

이틀에 걸쳐 세 타임으로 일정을 잡아 보았는데요. 

강연을 들어주신 분들이 많은 영감을 얻고 배울 수 있었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전 늘 강연이나 강의를 듣던 사람이었는데... 

생산자로서의 기쁨을 다시금 느꼈습니다.

소비자, 향유자라는 포지션에 늘 머물러 있었는데 

생산자로 전환하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지요.


3. 20대 농부 시절: 제도권 사회를 벗어나, 자유인으로 살고자 한 실험


20대 시절, 저는 자급자족을 꿈꾸며 생태 농사를 짓던 농부였어요. 

전업 농부는 아니었습니다. 


직장 일을 하면서 주말이나 공휴일을 활용해 

뜻이 맞는 청년들과 함께 논과 밭농사를 지었어요.

( 호미 들고 풀 메기를 하던 한때. 

풀 메기 할 때 마치 명상을 하는 듯한 느낌을 아주 좋아했다.)


화학제품이나 비료, 비닐, 기계를 사용하지 않는 생태 방식의 농사였지요. 

허리를 숙이며 손으로 모를 하나하나 심었고 탈곡할 때도 발 탈곡기를 이용했습니다. 

밭에도 비닐을 덮지 않고 오줌 비료를 주었어요.


배낭여행뿐 아니라 대안을 실현해볼 수 있는지 

가능성을 시험해보기 위한 행동을 계속 이어갔어요. 

청년들을 위한 귀농 귀촌 캠프에 참여하기도 하고, 

대안학교의 교사로서 일해보기도 했답니다. 


그렇게 전 대중이 가는 길과는 멀찍이 떨어져 계속 걸어가고 있었죠.

( 땅을 살리는 생태 농부를 지향하는 청년들과 모내기 중에 잠시 허리 들고 찰칵! )


대학에 이어 직장 생활까지 제도화된 삶을 계속 살았지만,

그 틀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몹시 간절했어요. 


저는 시스템 안에서 벗어나,

주체적이고 독립적으로 살고자 하는 욕망이 

어마어마한 사람이었으니까요.


장기 여행도 자주 다녔어요. 

입사와 퇴사를 반복하며 3개월에서 1년간의 아시아 장기 배낭여행을 여러 번 떠났습니다.

( 미얀마 전통 의상, 론지를 입고.

전통 의상을 입고 다니는 건 현지 문화를 존중하는 여행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또 그렇게 입고 다니면 현지인으로 봐 주어 또 다른 자아를 얻은 듯해 재미가 쏠쏠했다. :))


제도권 사회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보다도 

탐험할 자유와 

세계인들과 교류하는 기쁨,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고 배워가는 즐거움이 주는 가치가 제게는 훨씬 귀중했거든요.


고등학생 시절, 저는 서울에서 이름난 대학을 목표로 공부했고 목표 달성에 성공했어요. 

하지만 그 안에서 배우는 게 별로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허망감과 분노감이란... 

대다수의 학생들이 그렇듯 저 역시 몸과 마음을 혹사시키고, 

피눈물을 쏟아가며 입시 공부를 해서 실망스러운 감정이 클 수밖에 없었죠.


사회인이 되어 일을 할 때도 여러 모순을 많이 경험했어요. 

하지만 2020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온라인 글쓰기와 사이드 프로젝트를 통해 

제가 원하는 길을 걸어가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저는 2021년 2월 퇴사 후, 창업가이자 디지털 노마드가 되었지요.


영어라는 옷에 글쓰기, 서비스 마인드, 다양한 경험 등 

저만의 자산과 무기를 활용하면 

앞으로도 굉장히 매력적인 서비스를 만들어 볼 수 있으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


4. 내 생의 또 다른 전환점, 태국 교환학생


태국 교환학생으로 지낼 때 사귄 미얀마 친구를 

지금도 미얀마를 찾아갈 때마다 만나고 있답니다. 

그 친구가 "It shaped your life."라고 말한 것처럼, 

태국에서의 교환학생 생활은 제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어요.

( 학교 국제 행사에서 미얀마 전통 의상, 론지를 입은 친구(Thant Zin)를 보고 다가가 

인사를 한 게 인연이 되어 지금도 안부를 물으며 지낸다. 

양곤 순환열차를 타고 가던 중에... )


보통은 패권(Hegemony)이 있는 국가의 언어, 

이를테면 영어, 중국어 등을 택해 외국어 학습을 하기 마련이죠. 


하지만 전 태국어를 처음 배우며 우리가 주류(Mainstream)만을 좇느라 

놓치는 가치들이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양한 문화에 대한 배움과 존중의 중요성을 많이 깨달았고요.


태국어는 제가 영어 이외의 외국어 중 가장 깊게 배워본 언어였는데요. 

이제껏 조금씩이라도 경험해본 외국어와는 다른

태국어만의 고유한 체계와 특성에 강하게 매료되었답니다.

( 태국어 수업을 같이 들은 캄보디아 친구, Sambo와. )


태국 친구들과 그곳에서 만난 외국인 친구들과 여전히 연락을 하고 있어요. 

태국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에 관한 에피소드를 하나 말씀드리자면, 

저는 이싼 지방의 우본 라차타니(Ubon Ratchathani)를 가기 위해 

방콕 훨람퐁 역에서 야간 기차를 탄 적이 있었어요.


맞은편 자리에 앉으신 분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분을 픽업 나오신 친구분 댁에서 며칠간 머무르기까지 했어요. 

세렌디피티(Serendipity: 생각지 못한 행운과 만남)를 경험한 것이죠!

이후 직장인이 되어서도,

휴가를 맞으면 선물을 싸 들고 그곳에 계신 가족분들을 뵈러 가곤 했답니다. 

2017년 말에는 우본 라차타니의 어느 고즈넉한 사원에서 불경을 외며 

평화로운 분위기 안에서 2018년 새해를 함께 맞았어요.

동남아시아의 매력에 푹 빠져버리게 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시절, 

말레이시아 사바 주(州)에서 열린 청소년 국제 교류 프로그램에 

통역으로 참여한 이후부터였어요. 

(맨 앞 오른쪽에서 두 번째)


원래도 동남아시아를 좋아했지만, 

태국에서 교환학생과 인턴으로서 지낸 1년간의 경험 덕에 더더욱 좋아져 버렸습니다.


여러 의미에서 태국은 제 인생관을 '형성(shape)' 하게 해주었어요. 

‘สบาย สบาย(사바이 사바이)’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태국어 단어에요. 

바로 ‘여유롭게, 천천히. 서두를 필요 없이.’라는 뜻이랍니다. :)


5.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호텔리어 시절, 아픔을 글로 치유한 이야기


2020년 1월, 전 어느 취업 관련 카페에 첫 직장이었던 호텔에서의 경험담을 풀어 보았는데요. 

그것이 베스트 글에 오른 경험이 있어요. 

호텔리어였을 때, 전 너무나도 힘들게 일을 했어요. 

일을 정말 못했기 때문이에요.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호텔에서 요구되는 중요한 능력인 스피드, 

오퍼레이션은 다루는 능력 등이 제게 너무나 부족했기 때문이었죠. 

중학생 시절부터 호텔리어를 꿈꿨기에 스스로가 더욱 비참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과거의 저에게 참 미안하지만, 매일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호텔 안에서 외국어 실력, 게스트 서비스 부분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수와 기계를 다루는데 굉장히 취약했어요.

다른 사람들이 1주일이면 배우는 것을 2주, 혹은 그 이상이 걸렸지요. 

실수를 자주하여 선배들에게 혼도 많이 나고, 욕도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이후 1년동안 아시아 장기 배낭여행을 떠나, 

제 자신과 화해하는 과정을 경험했습니다. 

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연습한 것이죠. 

그리고 약 5년이 지나서야 글을 통해 이전의 아픔을 담담하게 털어놓을 수 있었어요.

(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의 또바 호수의 숙소, 'Liberta Homestay'로 향할 때.

카우치 서핑으로 만난 인도네시아 친구와 함께였다. )


호텔이라는 직장을 경험해 보지 않았더라도 직장인이라면, 

특히 사회 초년생 시절을 겪었던 사람이라면 

글을 통해 굉장한 공감대 형성이 된다는 사실이 무척 신기하고도 기뻤어요.


그러면서 글이 주는 어마어마한 힘에 매료가 되었고, 

많은 분들로부터 호응을 받으며 

글과 제 자신에 대한 자신감도 많이 쌓을 수 있었습니다.


>> 당시에 카페에 썼던 글


6. 내가 궁극적으로 가고 싶은 길:  세계 시민, 그리고 나만의 색깔을 가진 사람


저는 세계 시민으로서 성장하고 싶습니다. 

‘세계시민’은 살아가면서 제가 늘 생각하고 관심을 갖는 주제에요. 

레바논에 폭발이 일어나도 나와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치부하지 않고, 

우리 모두는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 말입니다.

( Miss Mahidol(미스 마히돈) 선발 대회에서 2위를 수상했다! 

한복 덕을 톡톡히 보았기 때문이다. :))


오로지 나와 가족, 그리고 가까운 주변에만 관심을 쏟고 그것에만 매몰되기가 쉽습니다. 

전 우리가 세계 시민으로서, 

건강한 시민의식을 갖고 생활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기사를 보아도 미국, 영국과 같이 

국제 사회의 중심이 되는 국가에만 눈길이 쏠리기 쉽죠. 

마치 그 나라만이 전부인 것처럼 말입니다.


전 그러한 위험성을 경계하기 위해 대학생 때도 태국어 전공이 아님에도 

굳이 태국이라는 국가에 교환학생 자격으로 공부를 하러 갔어요. 

지금도 대한민국 사람들의 시선 저 바깥에 있는 

미얀마나 네팔 같은 국가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 읽고, 듣곤 한답니다.

( 운이 좋게도, 학교 기숙사 근처에 마침 태국에서 유서 깊은 공원, 

푸타몬톤 공원이 위치해 있었다. 그곳으로 친구들과 공덕을 쌓으러 간 날. )


앞으로도 주류가 이야기하는 가치나 

대다수가 좋다고 하는 길을 별생각 없이 따르고 싶지 않습니다. 


사람은 하늘에서 바늘을 떨어뜨렸을 때 

콩 하나에 박히는 확률로 태어난다고 하는데 

타인이, 사회가 살아가라는 대로 살아갈 마음이 결코 없거든요.

( 네팔에서 다친 다리가 다 나은 뒤 향한 발리에서, 전통 의상인 '케바야'를 입고. )


설령 따가운 눈총을 받을지라도 오로지 '나만의 색깔'로 채색하고, 

'나만의 향기'를 풍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이라면 저와 생각의 결이 비슷하신 분이겠지요? 

읽어주셔서 마음 깊이 고맙습니다. 

그리고 반갑습니다.


진달래 사랑방에서 저와 

마음을 나누어 주실 분과의 소중한 만남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

(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 

태국 교환학생 시절 사귄 인도네시아 친구가 설립한 사회적 기업, 

Dreamdelion을 위해 일하는 마을 여성분들을 뵈러 가는 시골길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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